새로운 세계는 지금 여기에서
미국의 인공지능 연구소 ‘오픈 AI’가 개발한 챗GPT가 세계적인 화제다. 인공지능계에서 1969년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한 사건에 비견할 만큼 획기적이라며 열광하고 있다. 세계 정상급의 바둑 선수와 체스 선수를 이긴 알파고를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어영역 인공지능 챗 GPT가 출시되었다. 챗봇의 대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AI 의 딥러닝 능력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인 언어능력의 도약을 이루어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런 능력에 대해 중국의 과학자 위안징후이는“지금까지는 인간만이 언어 능력을 개발했지만 AI도 이를 해냈다”며 “챗GPT에서 입증된 자연어 처리 능력은 인공 지능의 왕관”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과제를 도와주는 도구로, 번역을 도와주는 도구로, 자료를 정리해주고 핵심을 짚어주는 도구로 쓰일 뿐만 아니라, 대화 상대에 따른 답변을 할 수 있어서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이 대화형 인공지능은 출시된 지 일주일 만에 사용자가 10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타인의 연구자료를 인용표기 없이 퍼온다든지, 사용자의 지식과 의식 수준을 넘어서는 표현을 한다든지, 이것이 표절과 어떻게 다르냐는 등의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 등은 사회적 논의를 필요로 할 터이지만 이제 우리는 개별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자료를 접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심지어 철학자와 챗GPT와의 대화를 보고 누가 철학자인지 인공지능인지 모르겠다며 이런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인간의 직업과 능력을 잠식당한다며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챗 GPT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거나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펜실베이니아대의 이선 몰릭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과제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긁어 모으고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일 등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인간은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인간은 갈수록 진화할 과학기술을 지휘하는 일, 그들이 아직 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영역을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기하급수적 진화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는 이제 뒤돌아갈 수 없다.
인간이 여타의 동물이나 인공지능과 다른 점은 상상력에 있다고 하는데, 상상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너나 할 것없이 불완전하다. 또한 불완전함을 인지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한 과정을 사유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상상력을 통해 그 같은 과정을 이루어간다. 인류의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해갈 것이고 인간이 상상한 존재를 빚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왜 인간을 닮은, 또는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가.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에 의하면 인간이 불행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거침없는 팽창욕구를 지닌 존재이자 몸이라는 물성의 한계가 뚜렷한 존재임을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오이디푸스 기획’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고 지탱함으로서 인간으로서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과정을 밟아가면서 인간은 ‘성격’이라는 신경증을 구축한다. ‘성격’이라는 것은 죽음에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구축하기 시작한 방어기제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팽창하고자 하나 쉽게 무너져버리기도 한다. 이 거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빚으려 하는 것일 텐데, 나는 내가 빚은 인간을 키우며 더욱 두려움에 휩싸인다.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은 내 공포를 매일 확인하는 것이고 어느 날, 내 공포가 그대로 반영된 존재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후손을 낳고 기르면서 인간은 나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와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손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고, 지적작업의 결과로 빚은 인조인간을 키워가는 과정 역시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다.
그렇게 인간은 본능에 따른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지적 작업을 통해 인간을 닮은 존재를 창조하는 이야기를 창작해왔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빚었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생각하고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전능하지 않다. 인간은 성스러운 흙을 얻어 인간을 닮은 골렘을 빚었다. 그러나 골렘은 말을 할 줄 모른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골렘은 인간이 ‘시키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행동을 따라할 뿐이다.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인간은 골렘으로 만족할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외모만 모아서 만들어놓은 인간이 괴물로 태어난다. 이 괴물은 이름을 갖지 못해 괴물로 불리고 괴물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다. 정체를 부여받지 못해 자신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낳은 괴물에게 애틋한 부정을 느끼지만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다. 도망칠 뿐이다.
이런 실패와 오류를 바탕으로 인간은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루어갔다. 그렇게 수많은 존재들이 빚어졌다. 기능형 로봇과 사이보그와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 인공지능 AI 등.
이들은 인간이 어떤 방향의 기대를 가지고 만들었으나 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또는 과잉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존재로 방향을 틀면서 인류에게 무력감을 안기는 역할을 맡아왔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 결함, 또는 과잉으로 인해 피조물이 저질러놓은 사건을 맞딱뜨리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확인하고, 피조물 스스로 깨닫고 교정하기를 기대하기까지 한다. 기계에 불과한 존재들에게 물성 이상의 인간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더해 스스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진화한다’는 AI까지 만들었다. 인간은 상상을 현실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화하는 챗 GPT는 축적된 인류의 문화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고 인간은 습득한 그 정보를 지휘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우리가 급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학 역시 챗 GPT 같은 과학기술과 서로를 견인하며 새로운 사유를 향한 여정을 함께 할 것이다. 인류 공통의 상상력에 의지해.
미국의 인공지능 연구소 ‘오픈 AI’가 개발한 챗GPT가 세계적인 화제다. 인공지능계에서 1969년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한 사건에 비견할 만큼 획기적이라며 열광하고 있다. 세계 정상급의 바둑 선수와 체스 선수를 이긴 알파고를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어영역 인공지능 챗 GPT가 출시되었다. 챗봇의 대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AI 의 딥러닝 능력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인 언어능력의 도약을 이루어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런 능력에 대해 중국의 과학자 위안징후이는“지금까지는 인간만이 언어 능력을 개발했지만 AI도 이를 해냈다”며 “챗GPT에서 입증된 자연어 처리 능력은 인공 지능의 왕관”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과제를 도와주는 도구로, 번역을 도와주는 도구로, 자료를 정리해주고 핵심을 짚어주는 도구로 쓰일 뿐만 아니라, 대화 상대에 따른 답변을 할 수 있어서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이 대화형 인공지능은 출시된 지 일주일 만에 사용자가 10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타인의 연구자료를 인용표기 없이 퍼온다든지, 사용자의 지식과 의식 수준을 넘어서는 표현을 한다든지, 이것이 표절과 어떻게 다르냐는 등의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 등은 사회적 논의를 필요로 할 터이지만 이제 우리는 개별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자료를 접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심지어 철학자와 챗GPT와의 대화를 보고 누가 철학자인지 인공지능인지 모르겠다며 이런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인간의 직업과 능력을 잠식당한다며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챗 GPT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거나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펜실베이니아대의 이선 몰릭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과제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긁어 모으고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일 등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인간은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인간은 갈수록 진화할 과학기술을 지휘하는 일, 그들이 아직 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영역을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기하급수적 진화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는 이제 뒤돌아갈 수 없다.
인간이 여타의 동물이나 인공지능과 다른 점은 상상력에 있다고 하는데, 상상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너나 할 것없이 불완전하다. 또한 불완전함을 인지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한 과정을 사유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상상력을 통해 그 같은 과정을 이루어간다. 인류의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해갈 것이고 인간이 상상한 존재를 빚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왜 인간을 닮은, 또는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가.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에 의하면 인간이 불행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거침없는 팽창욕구를 지닌 존재이자 몸이라는 물성의 한계가 뚜렷한 존재임을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오이디푸스 기획’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고 지탱함으로서 인간으로서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과정을 밟아가면서 인간은 ‘성격’이라는 신경증을 구축한다. ‘성격’이라는 것은 죽음에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구축하기 시작한 방어기제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팽창하고자 하나 쉽게 무너져버리기도 한다. 이 거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빚으려 하는 것일 텐데, 나는 내가 빚은 인간을 키우며 더욱 두려움에 휩싸인다.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은 내 공포를 매일 확인하는 것이고 어느 날, 내 공포가 그대로 반영된 존재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후손을 낳고 기르면서 인간은 나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와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손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고, 지적작업의 결과로 빚은 인조인간을 키워가는 과정 역시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다.
그렇게 인간은 본능에 따른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지적 작업을 통해 인간을 닮은 존재를 창조하는 이야기를 창작해왔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빚었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생각하고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전능하지 않다. 인간은 성스러운 흙을 얻어 인간을 닮은 골렘을 빚었다. 그러나 골렘은 말을 할 줄 모른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골렘은 인간이 ‘시키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행동을 따라할 뿐이다.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인간은 골렘으로 만족할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외모만 모아서 만들어놓은 인간이 괴물로 태어난다. 이 괴물은 이름을 갖지 못해 괴물로 불리고 괴물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다. 정체를 부여받지 못해 자신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낳은 괴물에게 애틋한 부정을 느끼지만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다. 도망칠 뿐이다.
이런 실패와 오류를 바탕으로 인간은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루어갔다. 그렇게 수많은 존재들이 빚어졌다. 기능형 로봇과 사이보그와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 인공지능 AI 등.
이들은 인간이 어떤 방향의 기대를 가지고 만들었으나 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또는 과잉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존재로 방향을 틀면서 인류에게 무력감을 안기는 역할을 맡아왔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 결함, 또는 과잉으로 인해 피조물이 저질러놓은 사건을 맞딱뜨리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확인하고, 피조물 스스로 깨닫고 교정하기를 기대하기까지 한다. 기계에 불과한 존재들에게 물성 이상의 인간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더해 스스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진화한다’는 AI까지 만들었다. 인간은 상상을 현실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화하는 챗 GPT는 축적된 인류의 문화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고 인간은 습득한 그 정보를 지휘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우리가 급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학 역시 챗 GPT 같은 과학기술과 서로를 견인하며 새로운 사유를 향한 여정을 함께 할 것이다. 인류 공통의 상상력에 의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