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글쓰기인가
사람들은 타인의 진실에 설득된다.
개인화가 진행될수록 비대면이 아니라 선택적 대면이 이루어진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모두에게 균등하게 온 것은 아니다-윌리엄 깁슨
‘21세기 전세계를 휩쓰는 메가트렌드는 개인화이다.’-울리히 벡
미래의 성격은 ‘개인화’ 라고 할 수 있다. 개인화가 가져올 필연적 결과는 ‘애호하는 것을 통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발전의 근본 동력은 개인의 발견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농업사회의 가족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도시로 산업의 중심이 이전하게 되고 핵가족화 되면서 개인주의로 진행하게 되었다. 핵가족화되어 개별 가족단위로 살아가던 사회는 3차 산업혁명으로 최소 가족으로 나뉘게 되고 IT 기술의 발달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자택 근무가 가능해지면서 생활 패턴이 매우 달라지게 되었다. 근무시간이 유연해지고 집단 생활이 해체되면서 필연적으로 ‘개인화’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개인이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고 질문을 던지는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로 간다. 인간 개인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혁신이 이루어진다. 혁신은 호기심과 적응력이 이루어내는 것이다.
개인은 오랜 시간 지속되는 관계가 중심이 되는 가족공동체나 집단생활을 하는 직장근무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강제적, 강압적 관계를 맺는 삶을 지양하고 독자적, 자의적, 애호를 통해 만나는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
애호란 무엇일까. 개인화가 진행되어 강요된 관계가 느슨해지면 필연적으로 자기만의 시간이 생긴다. 나만의 시간이 생기게 되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미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모두 내 삶을 구성한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과 나를 바라보면 새로운 측면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있다. 간과하고 살았던 세계가 어느 순간 내 앞에 펼쳐진다. 내가 포착한 세계를 통해 내가 자각하는 순간이다. 삶의 기록을 남긴다.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태도이다.
모든 유기체 중 참으로 독특하게도 사람은 타인의 서사에 관심이 끌린다. 고독한 개인은 어떻게 다른 고독한 개인에게 이끌리게 되는 걸까.
모든 개인에게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 가깝게 지내면 본질적으로는 충돌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은 누구하고나 잘 지낼 수는 없다. 자기 삶을 상세히 관찰하고 그 심리적 추이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의 언어에 담긴 함의를 읽을 수 있다. 타인의 언어로 된 글을 읽음으로써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각을 통해 교감한다. 타인의 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 삶의 일부를 반영하고 나보다 한발 앞서거나 한 단계 깊이 들어간다. 내가 겪고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미묘한 정서를 타인의 글을 통해 깨닫는다. 그렇게 개인은 타인의 삶에 침투하고 같은 문제를 감각하고 함께 시대를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서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룰을 만든다.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면 자기만의 룰은 확장되어 사회의 새로운 룰,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보는 현실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타인의 서사에서 진실을 보기 어렵다. 강요된 공동체가 아닌 내가 선택한 공동체에서 나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자기 평가가 심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심신의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꽃 피우는 것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사실 자기 평가이다. 확인해본 적도 없으면서 못할 것이라 지레 짐작한다. 자기 평가가 두려워 객관성을 잃은 태도이다. 인간이 지닌 잠재력을 굳이 낮게 설정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인간이 얼마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민감한지 알려주는 <칵테일 효과>라는 것이 있다.
“몇 십 명이 모인 칵테일 파티에서 모두 각각 잡담을 하는데도 누군가 자기 이름을 말하면 그것만 또렷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 자리에 오고가는 방대한 양의 음성 정보를 초고속으로 ‘스캔’해서 자신과 연관된 정보 입력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런 메커니즘이 갖추어져 있다. ‘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나 ‘들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이것은 자기와 연관된 정보에 대한 과잉반응, 이른 바 헛발질이다.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자신의 관심사와 관련지어 버린다.” -우치다 다쓰루
생각해보자, 자기 평가를 누가 가장 객관적으로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평가절하한다. 뒷담화에서 잘 보여준다. 대부분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황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한 인간의 전체를 평가하기엔 적당치 않은 자리인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 면면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에 대해 타당하고도 합리적으로 평가를 할 만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지 않다. 뒷담화에서 자신에게 좋은 평가를 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평가를 왜 신경 써야 하겠는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평가에는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뒷담화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평가해주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없어 적절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평가를 끌어올릴 방법이 있을까. 자신의 잠재력을 탐색하고 발굴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능력을 어떻게 발굴할 수 있을지 기회를 만드는 것이 그 열쇠를 쥐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발굴하여 키운 능력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한층 높여줄 것이다.
언어와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자유로운 동시에 제약을 받는다.
인간의 언어는 개인이 상상력을 포함하여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지만, 언어의 룰을 지킨 글에 한하여 그렇게 된다. 모든 인간이 속한 세계는 언어의 룰 안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언어의 룰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새롭게 변화한다. 변화하는 언어의 룰을 어떻게 익히고 따라갈 것인가.
모든 언어는 타인을 대상으로 발화된다. 타인을 상정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언어는 거의 없다. 혼잣말조차 나와의 대화를 기조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타인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은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즉 객관성과 타인에게 가 닿기 위한 간절한 경외감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경외감이 없는 글쓰기는 배설, 배출, 감정의 폭발, 혼자 중얼거리기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제대로 읽히기 위해서는 타인이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타인들은 계층이 있고 쓰이는 언어가 다를 수 있다. 내가 가 닿고자 하는 타인과 나와의 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탐구해야 하며 다채로운 표현을 지어 타인으로 하여금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독서를 통해 풍부한 어휘력과 수많은 습작을 통해 훈련을 해서 소통의 기본을 익혀야 한다. 풍부한 독서는 내가 상정하는 독자의 폭을 넓혀준다. 나는 내 주변의 작은 세상에 속한 타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글을 쓸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 뿐만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진실에 설득된다.
개인화가 진행될수록 비대면이 아니라 선택적 대면이 이루어진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모두에게 균등하게 온 것은 아니다-윌리엄 깁슨
‘21세기 전세계를 휩쓰는 메가트렌드는 개인화이다.’-울리히 벡
미래의 성격은 ‘개인화’ 라고 할 수 있다. 개인화가 가져올 필연적 결과는 ‘애호하는 것을 통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발전의 근본 동력은 개인의 발견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농업사회의 가족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도시로 산업의 중심이 이전하게 되고 핵가족화 되면서 개인주의로 진행하게 되었다. 핵가족화되어 개별 가족단위로 살아가던 사회는 3차 산업혁명으로 최소 가족으로 나뉘게 되고 IT 기술의 발달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자택 근무가 가능해지면서 생활 패턴이 매우 달라지게 되었다. 근무시간이 유연해지고 집단 생활이 해체되면서 필연적으로 ‘개인화’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개인이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고 질문을 던지는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로 간다. 인간 개인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혁신이 이루어진다. 혁신은 호기심과 적응력이 이루어내는 것이다.
개인은 오랜 시간 지속되는 관계가 중심이 되는 가족공동체나 집단생활을 하는 직장근무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강제적, 강압적 관계를 맺는 삶을 지양하고 독자적, 자의적, 애호를 통해 만나는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
애호란 무엇일까. 개인화가 진행되어 강요된 관계가 느슨해지면 필연적으로 자기만의 시간이 생긴다. 나만의 시간이 생기게 되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미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모두 내 삶을 구성한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과 나를 바라보면 새로운 측면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있다. 간과하고 살았던 세계가 어느 순간 내 앞에 펼쳐진다. 내가 포착한 세계를 통해 내가 자각하는 순간이다. 삶의 기록을 남긴다.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태도이다.
모든 유기체 중 참으로 독특하게도 사람은 타인의 서사에 관심이 끌린다. 고독한 개인은 어떻게 다른 고독한 개인에게 이끌리게 되는 걸까.
모든 개인에게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 가깝게 지내면 본질적으로는 충돌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은 누구하고나 잘 지낼 수는 없다. 자기 삶을 상세히 관찰하고 그 심리적 추이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의 언어에 담긴 함의를 읽을 수 있다. 타인의 언어로 된 글을 읽음으로써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각을 통해 교감한다. 타인의 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 삶의 일부를 반영하고 나보다 한발 앞서거나 한 단계 깊이 들어간다. 내가 겪고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미묘한 정서를 타인의 글을 통해 깨닫는다. 그렇게 개인은 타인의 삶에 침투하고 같은 문제를 감각하고 함께 시대를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서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룰을 만든다.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면 자기만의 룰은 확장되어 사회의 새로운 룰,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보는 현실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타인의 서사에서 진실을 보기 어렵다. 강요된 공동체가 아닌 내가 선택한 공동체에서 나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자기 평가가 심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심신의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꽃 피우는 것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사실 자기 평가이다. 확인해본 적도 없으면서 못할 것이라 지레 짐작한다. 자기 평가가 두려워 객관성을 잃은 태도이다. 인간이 지닌 잠재력을 굳이 낮게 설정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인간이 얼마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민감한지 알려주는 <칵테일 효과>라는 것이 있다.
“몇 십 명이 모인 칵테일 파티에서 모두 각각 잡담을 하는데도 누군가 자기 이름을 말하면 그것만 또렷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 자리에 오고가는 방대한 양의 음성 정보를 초고속으로 ‘스캔’해서 자신과 연관된 정보 입력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런 메커니즘이 갖추어져 있다. ‘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나 ‘들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이것은 자기와 연관된 정보에 대한 과잉반응, 이른 바 헛발질이다.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자신의 관심사와 관련지어 버린다.” -우치다 다쓰루
생각해보자, 자기 평가를 누가 가장 객관적으로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평가절하한다. 뒷담화에서 잘 보여준다. 대부분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황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한 인간의 전체를 평가하기엔 적당치 않은 자리인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 면면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에 대해 타당하고도 합리적으로 평가를 할 만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지 않다. 뒷담화에서 자신에게 좋은 평가를 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평가를 왜 신경 써야 하겠는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평가에는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뒷담화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평가해주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없어 적절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평가를 끌어올릴 방법이 있을까. 자신의 잠재력을 탐색하고 발굴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능력을 어떻게 발굴할 수 있을지 기회를 만드는 것이 그 열쇠를 쥐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발굴하여 키운 능력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한층 높여줄 것이다.
언어와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자유로운 동시에 제약을 받는다.
인간의 언어는 개인이 상상력을 포함하여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지만, 언어의 룰을 지킨 글에 한하여 그렇게 된다. 모든 인간이 속한 세계는 언어의 룰 안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언어의 룰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새롭게 변화한다. 변화하는 언어의 룰을 어떻게 익히고 따라갈 것인가.
모든 언어는 타인을 대상으로 발화된다. 타인을 상정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언어는 거의 없다. 혼잣말조차 나와의 대화를 기조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타인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은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즉 객관성과 타인에게 가 닿기 위한 간절한 경외감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경외감이 없는 글쓰기는 배설, 배출, 감정의 폭발, 혼자 중얼거리기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제대로 읽히기 위해서는 타인이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타인들은 계층이 있고 쓰이는 언어가 다를 수 있다. 내가 가 닿고자 하는 타인과 나와의 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탐구해야 하며 다채로운 표현을 지어 타인으로 하여금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독서를 통해 풍부한 어휘력과 수많은 습작을 통해 훈련을 해서 소통의 기본을 익혀야 한다. 풍부한 독서는 내가 상정하는 독자의 폭을 넓혀준다. 나는 내 주변의 작은 세상에 속한 타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글을 쓸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 뿐만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