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 방현희 소설가
내 삶의 어떤 것이 나를 소설에 빠져들게 하였을까. 언제부터 나는 소설을 알게 되었을까.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왜 하필 소설이라는 형식을 원하게 되었을까. 문자로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세밀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
왜 소설을 쓰고자 하는지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쩌다 보니 신춘문예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번 응모나 해보자 하고 써서 보낸 것이 덜컥 당신이 되어 신문에 나오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알아보게 돼서 소설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소설가 김훈은 기자 생활을 하며 배운 것이 글쓰기이고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는 먹고살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윤후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하다가 대학을 철학과로 갔는데 처음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다른 학생들은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왔다고 한 반면 그는 시를 쓰고 싶고 시에 철학을 좀 써먹어 볼까 하여 철학과에 왔다고 말할 정도로 전 생애를 걸쳐 오직 문학에만 투신하고 있다.
소설가들 중에는 김연수처럼 어쩌다 보니 소설을 쓰게 되었고, 쓰다 보니 소설이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었고,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더라는 사람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오직 소설만 쓰고 싶어 했으며 다른 모든 분야에는 눈도 안 돌리고 소설만 쓰고 싶다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간절히 쓰고 싶어도 두려움이 너무 커서 제대로 시도조차 못 하거나 평생 이루지 못할까 봐 그 채울 수 없는 것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고 하기도 한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오랫동안 혼자 습작을 해 온 사람도 많다. 소설을 완성하여 그것을 타인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열망을 해소하지 못할 때의 고통은 나 역시 한동안 겪었던 것이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수십 편의 소설을 썼다 한들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면 결코 흡족하지 않다. 혼자만의 취미 생활에 불과할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취미조차 여러 매체를 통해 함께 나누고 있지 않은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은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열망인 것이다. 그렇다고 독자와 똑같은 수준의 쌍방소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열망의 저변에 깔린 욕망은 내 소설 앞에 누군가를 무릎 꿇게 하고 숭배하게 하고,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하고 싶은 지배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완벽히 일방적인 형태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독자를 유혹하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사랑을 바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독자를 유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단과 방법을 강구했는지, 특별한 전략과 전술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가장 적절한 길을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는 숨기고 태생적으로 유혹자인 양 처신해야 한다.
누군가를 유혹하여 내 글을 읽게 하고 가슴을 울려 감동하게 하고, 마침내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하는 욕망. 이것이 유혹에의 열망이 아니며 권력의지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한마디로 그 모든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척하며 타고난 소설가인 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 달라서 재능이 조금 더 특출한 사람은 분명 재능 덕을 더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지속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쉽게 고갈되고 만다.
그런 오해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 지망생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소설가는 혼자 골방에서 고행을 하듯 습작을 해서 혜성처럼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소설가는 스승을 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홀로 태어난 존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소설은 혼자 공부해야 한다고, 혼자 공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음악이나 그림을 혼자 공부해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이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요즘 보기 힘들 것이다. 음악과 그림, 그 이외의 전문 분야에서 ‘일만 시간의 법칙’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지만 데뷔한 지 십 년이 넘어 이미 충분히 능력을 검증받은 가수들도 계속적으로 보컬 레슨을 받고 탑 배우들 역시 지속적으로 연기 지도를 받는다고 한다. 데뷔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소설은 혼자 써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첫 번째 이유는 소설을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물론 한두 편의 소설을 쓰고 그만둘 것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로 살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지속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소설가로 죽기까지 매번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해 내내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고 연구하고 고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거의 대부분 말을 할 줄 안다는 데서 기인한다. 문자는 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며 말로 이야기를 술술 잘 풀어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위에 테크닉을 약간 익히면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테크닉을 익히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이란 테크닉을 익혀서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일상을 다양한 각도로 읽어내는 것이 어떻게 몇 가지의 테크닉을 익히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소설은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며 시대와 문화를 첨단에서 읽어내는 가장 예민한 장르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축적된 역사와 철학, 문학의 계통을 잡아 소설이 걸어온 족적을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소설의 위치를 알기 위해, 그리고 내가 현재 세계 소설 가운데 어디쯤에 자리하는지 알기 위해, 또 앞으로 창작 방향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소설 창작을 열심히 하고 있는 작가들 역시 끊임없는 자기 갱신이 필요하다. 등단하여 소설집을 한 권 낼 때까지는 멋모르고 할 수도 있다. 소설집을 한 권 상재하기까지 도사리고 있는 난관은 따로 이야기하자. 어쨌거나 소설집을 한 권 상재한 직후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된다. 소설집 한 권에 실리는 단편소설 7~8편, 많게는 10편쯤 쓰고 나면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다. 그때까지 세계도 변화했고 나 자신도 변화했다. 새로운 공부가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달라진 세계를 반영하기 위한 갱신이 필요한데 그것은 공부 없이 이룰 수 없다. 한층 더 깊고 더 넓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이 매 단계마다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야가 넓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깊이도 달라져야 한다.
다시 한동안 작업을 열심히 한다. 그즈음에 피드백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상을 받는다거나, 획기적인 평가를 받는다거나, 하는 새로운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시 소설을 쓸 수 있는 힘을 얻고 한동안 그 힘으로 다시금 고독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긴 과정에서 세상을 읽는 다층적인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바로 도태되고 만다.
등단이라는 것은 전문가 자격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훨씬 치열한 경쟁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 방현희 소설가
내 삶의 어떤 것이 나를 소설에 빠져들게 하였을까. 언제부터 나는 소설을 알게 되었을까.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왜 하필 소설이라는 형식을 원하게 되었을까. 문자로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세밀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
왜 소설을 쓰고자 하는지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쩌다 보니 신춘문예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번 응모나 해보자 하고 써서 보낸 것이 덜컥 당신이 되어 신문에 나오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알아보게 돼서 소설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소설가 김훈은 기자 생활을 하며 배운 것이 글쓰기이고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는 먹고살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윤후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하다가 대학을 철학과로 갔는데 처음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다른 학생들은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왔다고 한 반면 그는 시를 쓰고 싶고 시에 철학을 좀 써먹어 볼까 하여 철학과에 왔다고 말할 정도로 전 생애를 걸쳐 오직 문학에만 투신하고 있다.
소설가들 중에는 김연수처럼 어쩌다 보니 소설을 쓰게 되었고, 쓰다 보니 소설이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었고,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더라는 사람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오직 소설만 쓰고 싶어 했으며 다른 모든 분야에는 눈도 안 돌리고 소설만 쓰고 싶다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간절히 쓰고 싶어도 두려움이 너무 커서 제대로 시도조차 못 하거나 평생 이루지 못할까 봐 그 채울 수 없는 것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고 하기도 한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오랫동안 혼자 습작을 해 온 사람도 많다. 소설을 완성하여 그것을 타인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열망을 해소하지 못할 때의 고통은 나 역시 한동안 겪었던 것이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수십 편의 소설을 썼다 한들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면 결코 흡족하지 않다. 혼자만의 취미 생활에 불과할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취미조차 여러 매체를 통해 함께 나누고 있지 않은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열망은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열망인 것이다. 그렇다고 독자와 똑같은 수준의 쌍방소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열망의 저변에 깔린 욕망은 내 소설 앞에 누군가를 무릎 꿇게 하고 숭배하게 하고,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하고 싶은 지배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완벽히 일방적인 형태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독자를 유혹하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사랑을 바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독자를 유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단과 방법을 강구했는지, 특별한 전략과 전술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가장 적절한 길을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는 숨기고 태생적으로 유혹자인 양 처신해야 한다.
누군가를 유혹하여 내 글을 읽게 하고 가슴을 울려 감동하게 하고, 마침내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하는 욕망. 이것이 유혹에의 열망이 아니며 권력의지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한마디로 그 모든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척하며 타고난 소설가인 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 달라서 재능이 조금 더 특출한 사람은 분명 재능 덕을 더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지속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쉽게 고갈되고 만다.
그런 오해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 지망생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소설가는 혼자 골방에서 고행을 하듯 습작을 해서 혜성처럼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소설가는 스승을 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홀로 태어난 존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소설은 혼자 공부해야 한다고, 혼자 공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음악이나 그림을 혼자 공부해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이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요즘 보기 힘들 것이다. 음악과 그림, 그 이외의 전문 분야에서 ‘일만 시간의 법칙’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지만 데뷔한 지 십 년이 넘어 이미 충분히 능력을 검증받은 가수들도 계속적으로 보컬 레슨을 받고 탑 배우들 역시 지속적으로 연기 지도를 받는다고 한다. 데뷔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소설은 혼자 써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첫 번째 이유는 소설을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물론 한두 편의 소설을 쓰고 그만둘 것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로 살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지속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소설가로 죽기까지 매번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해 내내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고 연구하고 고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거의 대부분 말을 할 줄 안다는 데서 기인한다. 문자는 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며 말로 이야기를 술술 잘 풀어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위에 테크닉을 약간 익히면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테크닉을 익히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이란 테크닉을 익혀서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일상을 다양한 각도로 읽어내는 것이 어떻게 몇 가지의 테크닉을 익히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소설은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며 시대와 문화를 첨단에서 읽어내는 가장 예민한 장르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축적된 역사와 철학, 문학의 계통을 잡아 소설이 걸어온 족적을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소설의 위치를 알기 위해, 그리고 내가 현재 세계 소설 가운데 어디쯤에 자리하는지 알기 위해, 또 앞으로 창작 방향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소설 창작을 열심히 하고 있는 작가들 역시 끊임없는 자기 갱신이 필요하다. 등단하여 소설집을 한 권 낼 때까지는 멋모르고 할 수도 있다. 소설집을 한 권 상재하기까지 도사리고 있는 난관은 따로 이야기하자. 어쨌거나 소설집을 한 권 상재한 직후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된다. 소설집 한 권에 실리는 단편소설 7~8편, 많게는 10편쯤 쓰고 나면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다. 그때까지 세계도 변화했고 나 자신도 변화했다. 새로운 공부가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달라진 세계를 반영하기 위한 갱신이 필요한데 그것은 공부 없이 이룰 수 없다. 한층 더 깊고 더 넓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이 매 단계마다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야가 넓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깊이도 달라져야 한다.
다시 한동안 작업을 열심히 한다. 그즈음에 피드백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상을 받는다거나, 획기적인 평가를 받는다거나, 하는 새로운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다시 소설을 쓸 수 있는 힘을 얻고 한동안 그 힘으로 다시금 고독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긴 과정에서 세상을 읽는 다층적인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바로 도태되고 만다.
등단이라는 것은 전문가 자격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훨씬 치열한 경쟁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