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 (defamiliarization)
표현이란 내면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을 문자나 음률, 그림 등을 통해 외면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사람이 지금 과거를 더듬어 가고 있는지 현재 어느 사건에 눈을 빛내며 몰입하고 있는지 먼 미래의 어떤 상태를 꿈꾸고 있는지 읽을 수가 있다.
어떤 특별한 음률이 지금 나의 어느 감정과 꼭 맞아떨어지면 감정은 증폭되어 (내면에 갇혀 있으려 하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표현은 단지 혼자만의 느낌으로 남아 있지 않고 타인의 무엇인가를 건드리기 위해 뾰족한 촉수를 거느리게 된다. 표현이란 것이 없었다면 인간의 공감 능력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현이란 상호작용을 유발하는 것이지, 단일한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은 ‘장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장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워진다.
장치는 비유와 설정 등을 말한다.
비유에는 상징, 은유, 제유, 환유, 알레고리 등이 있다.
설정은 이미 쓰일 대로 쓰인 이야기, 사건, 인물의 캐릭터 등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문장에서 새로운 표현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 하성란의 <곰팡이꽃>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이 소설은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을 따라간 것으로 평가되는 소설이다.
오층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놀이터는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 같다. 이틀 전 내린 폭우로 놀이터 곳곳에는 채 빠지지 않은 흙탕물이 고여 있다. 여자가 걸터앉은 시소의 반대쪽도, 아이가 매달려 있는 ‘구름사다리’ 아래도 물이 고여 있다.
여자는 콩깍지를 까고 있다. 깍지를 비틀 때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얼룩무늬의 강낭콩 알들이 나란히 나타난다. 여자의 손가락은 풋내가 물씬하다. 깍지에서 튄 콩이 모래밭 위로 날아가면 여자는 허겁지겁 엉덩이를 공중으로 쳐들고 콩을 줍는다. 여자가 걸터 앉은 시소가 무게 중심을 찾아 위로 조금 떠오른다. 아이의 체중은 철봉에 매달린 오른손에 실려 있다. 사내아이는 지금 셋째 칸에서 넷째 칸으로 건너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발을 적시지 않고 마른 땅으로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이 구름사다리를 다 건너가야만 한다. 흘러내린 바지와 오른팔 쪽으로 치켜올라간 윗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눈이 부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남자에게는 여자의 구부린 등과 모래밭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만이 보일 뿐이다. 어느덧 바구니에는 강낭콩이 수북이 쌓인다. 오늘 저녁 강낭콩밥을 지으시게요? 남자는 여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에게까지 남자의 목소리는 가 닿지 않는다. 그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이 사이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죠. 저에게도 좀 나눠주시겠어요? 남자는 베란다 창가에 선 채 계속 입술을 달싹거린다. 콩깍지를 덮고 있는 가실가실한 솜털의 촉감과 콩깍지의 틈을 벌리느라 엄지손톱에 낀 섬유질까지 전부 다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여자는 아까부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콩에만 열중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 같다. 아이는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여전히 철봉에 매달린 채 이를 앙다물고 있다.
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 끼고 있던 수첩을 꺼낸다. 엉덩이에 눌린 수첩은 완만하게 구부러들어 있다. 한 장을 넘기려니 덩달아 다른 장까지 붙어 넘어간다. 갈피 사이에 음식 찌꺼끼가 묻은 채 그대로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콩깍지, 시소, 구름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
남자는 그 여자를 기억할 만한 몇 개의 단어를 적는다. 콩을 까고 버린 콩깍지는 수많은 쓰레기 봉투 가운데서 그 여자를 식별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다.
설명 한 줄 없지만 앞으로 어떤 내용이 진행될지 시각적 정보만으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낯선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관찰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천운영의 <명랑>은 현재를 살고 있는 화자와 과거를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매개하는 특별한 약물이 이중의 의미를 띠고 소설의 분위기를 감각적이면서도 가볍고 역설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한다. 천운영의 <명랑>을 살펴보자.
문이 움직인다. 느리고 은밀하게, 딱 한 뼘만큼만 열린다. 벽과 똑같은 색의 미닫이문은 낯선 세계로 통하는 비밀통로 같다. 열린 문으로 어둠이 밀려나온다. 어둠 속에는 늙은이의 살내에 곰팡이 핀 과일, 눅눅한 솜이불, 좀약 냄새가 뒤섞여 있다.
어둠을 헤치고 나오는 한 점, 희고 뾰족한 버선코다. 점이었던 것은 부드러운 선이 되었다가 단단한 볼이 된다. 살짝 추켜 올라간 수눅선을 따라 뒤꿈치와 회목이 느릿느릿 문지방을 넘는다. 그 움직임이 너무 느려 처음부터 내내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열린 문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희디흰 버선발뿐이다. 흰 버선발은 어둠과 냄새의 여운을 말끔하게 몰아낸다. 오히려 발등에 수놓아진 붉은 꽃송이에서 향긋한 꽃내음이라도 풍겨나오는 듯하다. 내 눈은 향기를 맡은 꿀벌처럼 버선발을 향해 부산한 날갯짓을 한다. (……)
그녀의 발은 촉수를 세운 더듬이다.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탐색하고 위험을 감지한다. 탐색은 집요하리만치 계속된다. 낡은 항라 치마를 바스락거리며 다리가 나온 것은 두 발을 내밀고도 한참이 지나서다. 이윽고 검버섯 핀 손이 문지방을 짚는다. 그녀의 손은 말라비틀어진 빵 같다. 뼈와 핏줄이 드러난 얇은 살갗 위에는 저승꽃이 곰팡이처럼 무리지어 피어있다. (……)
그녀는 속옷 위에 치마만 두른 차림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저고리를 잘 입지 않는다. 저고리를 손에 꿸 때마다 가슴께가 아파온다고 고통을 호소하곤 한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녀가 치마춤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녀의 손에 공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가 달려나온다. 그녀는 처진 눈꺼풀을 추켜올리며 조심스럽게 약봉지를 펼친다. 오각형으로 집힌 약종이를 한 겹 한 겹 펼칠 때마다 하얀 가루가 하늘하늘 피어오른다. 방 안에는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그녀의 갸릉거리는 숨소리만 나직하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훔쳐본다.
소설 <명랑>에서는 명랑이라는 역설적이고 이중적 의미를 가진 약이 주요 장치로 쓰였다.
하성란의 <곰팡이꽃>과 천운영의 <명랑>은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이 소설들은 주된 소재를 세밀히 묘사하여 그 감각을 독자가 고스란히 느끼게 함으로써 금속판에 뾰족한 바늘로 새기는 에칭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표현이란 이처럼 문자 이면의 것을 은유나 상징 등을 써서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사용된다. 아내가 집을 나간 사건, 짝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과도한 관심,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갈등 등의 보편적인 이야깃거리에 익숙한 문체를 쓴다면 새로운 관점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주제도 생길 수가 없다. 사건의 속성을 반영하면서도 의외성을 안겨줄 소재와 그것에 적합한 표현, 즉 묘사 중심일 것이냐 설명을 주로 사용할 것이냐, 감각을 하나 이상 사용하거나 상반된 이미지를 동원하여 삶의 양면성을 보여주거나,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독자로서는 평소 습관적인 세계의 감각들에 익숙해져 있다가 새로운 감각이나 감성에 도전을 받을 때가 있다. 지금까지 익숙한 통로 역할을 했던 감각 기관이 인식할 수 없는 새로운 패턴의 사상이나 심상이 밀고 들어올 때이다. 이로 인해 개인은 언어관이나 가치관에 동요가 생기는데 자신의 감각 기관을 열어놓고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을 둘러싼 감각의 문자화 과정을 살펴보면 언어 조작을 통해 독자의 경험이나 신체 감각의 틀을 재편성하거나 완전히 바꿀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신체적 감각조차 기호적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며 각 개인은 문화적·사회적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속한 문화․사회적 공통분모에 속한 독자에게 자기의 시각으로의 동참을 이끌 수도 있고, 자기가 속하지 않은 문화·사회권에까지 새로운 시각의 동참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이처럼 여기 있으면서도 마치 이 나라, 이 민족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처럼 낯선 감각들에 둘러싸이는 순간을 겪게 한다. 무채색의 거리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가 태양이 강렬한 인도나 아프리카 대륙에 놓였을 때 우리는 기존의 색채 감각에서 느끼던 감정을 뛰어넘는 감흥을 느끼곤 하는 것처럼. 이것이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다.
[1] 비유할 때 본 대상의 속성과 비유의 대상에 공통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비유는 상황이나 그 대상에 맞아야 한다. 즉 비유는 속성이 같을 때 쓸 수 있다.
* 좋은 예문 : 목소리만이 걸림돌이 아니다. 물속에 잠겨버린 것처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쓰는 에너지의 십 분의 일만큼도 못 움직인다. 짜디짠 심해에서 숨을 쉬는 느낌이다. 얼굴 표피가 녹아 눈코입이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았다면 십중팔구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삽시에 이리저리 도망가는 너를 자꾸 놓친다. 하얗던 하늘이 붉게 채색되었다. 태양 타는 냄새가 짭짤하게 달다.
- 글로서기 회원 최수아의 글에서
* 좋지 않은 예문 : ‘마침내 그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아스피린처럼 온통 풀어져 내리고 말았다.’ 왜 아스피린인가? 작품 속에서 아스피린을 복용한다던가 이와 관계된 상황이 있을 때 비로소 아스피린을 비유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소설의 밀도를 높여 준다. 뜬금없이 아스피린을 쓴다면 독자는 생경함을 느낄 뿐이다.
[2] 비유나 에피소드 쓸 때 그 작품의 어조, 분위기가 맞아야 한다. 단어 하나까지도! 이것들이 쌓일 때 작품을 탄탄하게 만든다.
[3] 비유할 때 무엇이 주안점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 좋지 않은 예문 : 금세 하얀 김을 피워 올리는 노란색 욕조는 방금 막 어미 닭의 품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 같았다.
→ 이 문장에서 욕조를 병아리에 비유했으나 이 문장에서는 노란색이 주안점이다 그렇다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 좋은 예문 : 욕조의 노란색은 방금 어미 닭의 품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 같았다.
[4] 구체적인 사물들을 그 속성을 살려서 인간의 경험이나 인상에 붙여 준다. 즉 사물의 모습이나 성질 등을 나의 경험적 차원으로 연결하여 내가 가진 분위기에다 비유를 통하여 붙여 준다. 문장은 설명하지 말고 잘 비틀어 준다.
* 좋은 예문 : 남자의 체취가 담긴 조각들을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처럼 졸졸 쫓아갔다.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아니라 묘하게 쾨쾨한 냄새가 나를 더욱 그에게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이 흔히 지하 주차장 냄새와 주유소 기름 냄새에 반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까. 차이가 있다면 다들 웬만큼 인상을 찌푸릴 냄새일 텐데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쫓아간다는 것일 게다.
- 글로서기 회원 최수아의 글에서
[5] 매끄러운 것과 투박한 것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문장에서 하나를 매끄럽게 짚어주고 이어지는 다음 문장도 매끄럽게 이어주면 이 문장들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진다.
* 좋지 않은 예문 : 사이키 조명과 터질 듯한 음악 속에서 내 발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 문장은 그냥 날렵할 뿐이다.
* 좋은 예문 : 사람들을 조각조각 찢는 듯한 사이키 조명과 터질 듯한 음악 속에서 내 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렇게 평범한 수식어를 넣어주면 조금 투박해지면서 무게를 갖게 된다. 언어는 구체적 사물을 지칭하면 좋다. 구체적인 것을 예로 들 때 문장이 탄탄해진다. 비유할 것과 모양, 속성이 맞아야 한다.
표현이란 내면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을 문자나 음률, 그림 등을 통해 외면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사람이 지금 과거를 더듬어 가고 있는지 현재 어느 사건에 눈을 빛내며 몰입하고 있는지 먼 미래의 어떤 상태를 꿈꾸고 있는지 읽을 수가 있다.
어떤 특별한 음률이 지금 나의 어느 감정과 꼭 맞아떨어지면 감정은 증폭되어 (내면에 갇혀 있으려 하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표현은 단지 혼자만의 느낌으로 남아 있지 않고 타인의 무엇인가를 건드리기 위해 뾰족한 촉수를 거느리게 된다. 표현이란 것이 없었다면 인간의 공감 능력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현이란 상호작용을 유발하는 것이지, 단일한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은 ‘장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장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워진다.
장치는 비유와 설정 등을 말한다.
비유에는 상징, 은유, 제유, 환유, 알레고리 등이 있다.
설정은 이미 쓰일 대로 쓰인 이야기, 사건, 인물의 캐릭터 등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문장에서 새로운 표현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 하성란의 <곰팡이꽃>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이 소설은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을 따라간 것으로 평가되는 소설이다.
오층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놀이터는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 같다. 이틀 전 내린 폭우로 놀이터 곳곳에는 채 빠지지 않은 흙탕물이 고여 있다. 여자가 걸터앉은 시소의 반대쪽도, 아이가 매달려 있는 ‘구름사다리’ 아래도 물이 고여 있다.
여자는 콩깍지를 까고 있다. 깍지를 비틀 때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얼룩무늬의 강낭콩 알들이 나란히 나타난다. 여자의 손가락은 풋내가 물씬하다. 깍지에서 튄 콩이 모래밭 위로 날아가면 여자는 허겁지겁 엉덩이를 공중으로 쳐들고 콩을 줍는다. 여자가 걸터 앉은 시소가 무게 중심을 찾아 위로 조금 떠오른다. 아이의 체중은 철봉에 매달린 오른손에 실려 있다. 사내아이는 지금 셋째 칸에서 넷째 칸으로 건너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발을 적시지 않고 마른 땅으로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이 구름사다리를 다 건너가야만 한다. 흘러내린 바지와 오른팔 쪽으로 치켜올라간 윗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눈이 부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남자에게는 여자의 구부린 등과 모래밭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만이 보일 뿐이다. 어느덧 바구니에는 강낭콩이 수북이 쌓인다. 오늘 저녁 강낭콩밥을 지으시게요? 남자는 여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에게까지 남자의 목소리는 가 닿지 않는다. 그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이 사이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죠. 저에게도 좀 나눠주시겠어요? 남자는 베란다 창가에 선 채 계속 입술을 달싹거린다. 콩깍지를 덮고 있는 가실가실한 솜털의 촉감과 콩깍지의 틈을 벌리느라 엄지손톱에 낀 섬유질까지 전부 다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여자는 아까부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콩에만 열중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 같다. 아이는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여전히 철봉에 매달린 채 이를 앙다물고 있다.
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 끼고 있던 수첩을 꺼낸다. 엉덩이에 눌린 수첩은 완만하게 구부러들어 있다. 한 장을 넘기려니 덩달아 다른 장까지 붙어 넘어간다. 갈피 사이에 음식 찌꺼끼가 묻은 채 그대로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콩깍지, 시소, 구름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
남자는 그 여자를 기억할 만한 몇 개의 단어를 적는다. 콩을 까고 버린 콩깍지는 수많은 쓰레기 봉투 가운데서 그 여자를 식별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다.
설명 한 줄 없지만 앞으로 어떤 내용이 진행될지 시각적 정보만으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낯선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관찰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천운영의 <명랑>은 현재를 살고 있는 화자와 과거를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매개하는 특별한 약물이 이중의 의미를 띠고 소설의 분위기를 감각적이면서도 가볍고 역설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한다. 천운영의 <명랑>을 살펴보자.
문이 움직인다. 느리고 은밀하게, 딱 한 뼘만큼만 열린다. 벽과 똑같은 색의 미닫이문은 낯선 세계로 통하는 비밀통로 같다. 열린 문으로 어둠이 밀려나온다. 어둠 속에는 늙은이의 살내에 곰팡이 핀 과일, 눅눅한 솜이불, 좀약 냄새가 뒤섞여 있다.
어둠을 헤치고 나오는 한 점, 희고 뾰족한 버선코다. 점이었던 것은 부드러운 선이 되었다가 단단한 볼이 된다. 살짝 추켜 올라간 수눅선을 따라 뒤꿈치와 회목이 느릿느릿 문지방을 넘는다. 그 움직임이 너무 느려 처음부터 내내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열린 문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희디흰 버선발뿐이다. 흰 버선발은 어둠과 냄새의 여운을 말끔하게 몰아낸다. 오히려 발등에 수놓아진 붉은 꽃송이에서 향긋한 꽃내음이라도 풍겨나오는 듯하다. 내 눈은 향기를 맡은 꿀벌처럼 버선발을 향해 부산한 날갯짓을 한다. (……)
그녀의 발은 촉수를 세운 더듬이다.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탐색하고 위험을 감지한다. 탐색은 집요하리만치 계속된다. 낡은 항라 치마를 바스락거리며 다리가 나온 것은 두 발을 내밀고도 한참이 지나서다. 이윽고 검버섯 핀 손이 문지방을 짚는다. 그녀의 손은 말라비틀어진 빵 같다. 뼈와 핏줄이 드러난 얇은 살갗 위에는 저승꽃이 곰팡이처럼 무리지어 피어있다. (……)
그녀는 속옷 위에 치마만 두른 차림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저고리를 잘 입지 않는다. 저고리를 손에 꿸 때마다 가슴께가 아파온다고 고통을 호소하곤 한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녀가 치마춤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녀의 손에 공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가 달려나온다. 그녀는 처진 눈꺼풀을 추켜올리며 조심스럽게 약봉지를 펼친다. 오각형으로 집힌 약종이를 한 겹 한 겹 펼칠 때마다 하얀 가루가 하늘하늘 피어오른다. 방 안에는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그녀의 갸릉거리는 숨소리만 나직하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훔쳐본다.
소설 <명랑>에서는 명랑이라는 역설적이고 이중적 의미를 가진 약이 주요 장치로 쓰였다.
여기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사용된다. 아내가 집을 나간 사건, 짝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과도한 관심,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갈등 등의 보편적인 이야깃거리에 익숙한 문체를 쓴다면 새로운 관점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주제도 생길 수가 없다. 사건의 속성을 반영하면서도 의외성을 안겨줄 소재와 그것에 적합한 표현, 즉 묘사 중심일 것이냐 설명을 주로 사용할 것이냐, 감각을 하나 이상 사용하거나 상반된 이미지를 동원하여 삶의 양면성을 보여주거나,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독자로서는 평소 습관적인 세계의 감각들에 익숙해져 있다가 새로운 감각이나 감성에 도전을 받을 때가 있다. 지금까지 익숙한 통로 역할을 했던 감각 기관이 인식할 수 없는 새로운 패턴의 사상이나 심상이 밀고 들어올 때이다. 이로 인해 개인은 언어관이나 가치관에 동요가 생기는데 자신의 감각 기관을 열어놓고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을 둘러싼 감각의 문자화 과정을 살펴보면 언어 조작을 통해 독자의 경험이나 신체 감각의 틀을 재편성하거나 완전히 바꿀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신체적 감각조차 기호적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며 각 개인은 문화적·사회적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속한 문화․사회적 공통분모에 속한 독자에게 자기의 시각으로의 동참을 이끌 수도 있고, 자기가 속하지 않은 문화·사회권에까지 새로운 시각의 동참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이처럼 여기 있으면서도 마치 이 나라, 이 민족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처럼 낯선 감각들에 둘러싸이는 순간을 겪게 한다. 무채색의 거리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가 태양이 강렬한 인도나 아프리카 대륙에 놓였을 때 우리는 기존의 색채 감각에서 느끼던 감정을 뛰어넘는 감흥을 느끼곤 하는 것처럼. 이것이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다.
[1] 비유할 때 본 대상의 속성과 비유의 대상에 공통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비유는 상황이나 그 대상에 맞아야 한다. 즉 비유는 속성이 같을 때 쓸 수 있다.
* 좋은 예문 : 목소리만이 걸림돌이 아니다. 물속에 잠겨버린 것처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쓰는 에너지의 십 분의 일만큼도 못 움직인다. 짜디짠 심해에서 숨을 쉬는 느낌이다. 얼굴 표피가 녹아 눈코입이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았다면 십중팔구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삽시에 이리저리 도망가는 너를 자꾸 놓친다. 하얗던 하늘이 붉게 채색되었다. 태양 타는 냄새가 짭짤하게 달다.
- 글로서기 회원 최수아의 글에서
* 좋지 않은 예문 : ‘마침내 그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아스피린처럼 온통 풀어져 내리고 말았다.’ 왜 아스피린인가? 작품 속에서 아스피린을 복용한다던가 이와 관계된 상황이 있을 때 비로소 아스피린을 비유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소설의 밀도를 높여 준다. 뜬금없이 아스피린을 쓴다면 독자는 생경함을 느낄 뿐이다.
[2] 비유나 에피소드 쓸 때 그 작품의 어조, 분위기가 맞아야 한다. 단어 하나까지도! 이것들이 쌓일 때 작품을 탄탄하게 만든다.
[3] 비유할 때 무엇이 주안점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 좋지 않은 예문 : 금세 하얀 김을 피워 올리는 노란색 욕조는 방금 막 어미 닭의 품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 같았다.
→ 이 문장에서 욕조를 병아리에 비유했으나 이 문장에서는 노란색이 주안점이다 그렇다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 좋은 예문 : 욕조의 노란색은 방금 어미 닭의 품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 같았다.
[4] 구체적인 사물들을 그 속성을 살려서 인간의 경험이나 인상에 붙여 준다. 즉 사물의 모습이나 성질 등을 나의 경험적 차원으로 연결하여 내가 가진 분위기에다 비유를 통하여 붙여 준다. 문장은 설명하지 말고 잘 비틀어 준다.
* 좋은 예문 : 남자의 체취가 담긴 조각들을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처럼 졸졸 쫓아갔다.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아니라 묘하게 쾨쾨한 냄새가 나를 더욱 그에게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이 흔히 지하 주차장 냄새와 주유소 기름 냄새에 반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까. 차이가 있다면 다들 웬만큼 인상을 찌푸릴 냄새일 텐데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쫓아간다는 것일 게다.
- 글로서기 회원 최수아의 글에서
[5] 매끄러운 것과 투박한 것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문장에서 하나를 매끄럽게 짚어주고 이어지는 다음 문장도 매끄럽게 이어주면 이 문장들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진다.
* 좋지 않은 예문 : 사이키 조명과 터질 듯한 음악 속에서 내 발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 문장은 그냥 날렵할 뿐이다.
* 좋은 예문 : 사람들을 조각조각 찢는 듯한 사이키 조명과 터질 듯한 음악 속에서 내 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렇게 평범한 수식어를 넣어주면 조금 투박해지면서 무게를 갖게 된다. 언어는 구체적 사물을 지칭하면 좋다. 구체적인 것을 예로 들 때 문장이 탄탄해진다. 비유할 것과 모양, 속성이 맞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