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희 소설가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진리의 기준은 열정과 감각이라고 했다.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란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열정과 감각은 새로움을 창조하게 되어 있으니까. 다시 말하면 진리란 창조되는 것이라는 뜻이지 않을까.

 

요즈음 글쓰기에 대한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한다.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드는데 왜 이렇게 무언가를 기록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아지는 걸까.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겪은 어떤 일을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통의 근원을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 진면목을 확인하고자 자기를 낱낱이 들여다보는 기회, 나와 관계된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사건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 이런 것들을 쓰고 싶다고 한다.

크게 보아 이런 욕망을 담은 글이 소설의 범주에 들 것이다. 그런데 이 몇 가지 문제를 날것 그대로 적는다고 소설이 되는가. 날것 그대로를 기록한 글들은 그런 글대로 감동을 주겠지만 보다 내밀하고 보다 감동의 진폭이 큰 어떤 미적 형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소설이란 형식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맨 처음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를 돌이켜본다. 초등학교 3, 4학년에 불과했던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싶어 했었던가. 책에서 만난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세계가 거기 있었다. 소설이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표현해줘서 나도 그처럼 내 마음을 잘 표현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딱히 소설이어야 했던 것은 골방이나 다락에서 책을 읽으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집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했던 성격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의 이론에서 변함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루카치는 “소설은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서사”라고 했다. 잃어버린 어떤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남으로써, 내가 잃어버렸던 영혼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루카치의 명제가 유효할 것이다.


소설은 형식을 막론하고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사건이란 우리의 습관적인 세계에 구멍이 뚫린 것, 틈이 생긴 것, 심하게는 무너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던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자. 그 사고로 다리를 하나 잃었다고 하자. 우리는 다시는 두 다리로 걷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리가 없어졌어도 여전히 있는 것처럼 환상통을 느낀다. 환상통을 극복하고 나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다리를 잃었다는 것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소설이 되어줄 것이다.

소설은 우리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열망을 일깨운다. 소설은 어떤 도구를 써서 (소재), 어떤 수단을 써서(장치), 무엇을 돌이켜(과거 시점), 어떤 행위를 해서(현재 시점), 그 사건 때문에 벌어진 일상의 틈을 복구할 것이냐(존재의 갱신), 하는 일련의 과정이 벌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미지의 영역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이끌어가는 습관적인 행위만으로는 결코 이르게 하지 못할 어떤 세계로, 우리는 달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소설 그 자체가 어디에서 그의 생을 마칠지 알지 못한다.




소설가는 누구인가


 “난 예술가야, 당신이 시인이라면 당신은 무자비해야 해! 그래야 진실을 말할 수 있거든! 그렇게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어야 해.” - <레이지Rage>(샐리 포터 감독, 2009>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개 자기 가슴에 맺힌 오래된 이야기라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오직 소설가가 되겠다고 생각해왔고 결국 소설가가 되었지만 가슴속에 품은 한 가지 열망만으로 소설가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유달리 감수성이 컸다는 것,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에서 숙성시켜왔다는 점, 안락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점, 가족이 많고 개성이 강해서 별별 일을 다 겪었다는 점, 십여 년 동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에서 매일 생사의 급격한 온도차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 치열하게 사랑했고 지독하게 배신당했으며, 숱한 기대와 좌절을 겪었고 오랜 시간 동안 매일같이 자다가도 벌떡벌떡 놀라서 깰 만큼 삶이란 게 이토록 무서운 것임을 모골이 송연하게 겪으며 살아야 했다는 점, 이런 두려운 삶이 내게 끊임없이 글을 쓰도록 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는 점, 그러니 내가 내 고집으로 선택한 삶은 나에게 이토록 두려운 길을 걸어가게 했으며 그것을 견뎌내는 유일한 길이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동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동기를 지니고 비슷한 길을 걸어가면서 어떤 사람은 소설가의 문턱을 넘어 지속적으로 자기의 세계를 일구어 나가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왜일까. 

고등학생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매우 고독한 환경에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비밀을 지니고 있었고 둘 다 간절하게 소설가를 꿈꿨다. 수많은 책을 서로 돌려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보다 중요한 생각은 서로에게 편지로 남겼다. 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지 못했고, 그 친구는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소설가가 되었고 그 친구는 소설가가 되지 않았으며 다른 공부는 지속적으로 했으나 소설쓰기는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소설가가 되고자 했을 때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간절했던 열망은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친구와 나의 차이를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솔직하고 용감했다. 그래서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기만하지 않으려 했다). 자기를 기만하는 대신 자기를 왜곡시키려는 대상들과 싸웠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쉬웠고 내가 나 자신을 기만해가는 과정을 면밀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그 기만의 과정을 기록할 수 있었다. 기만을 애초에 의식하지 못한 자와 기만을 의식한 자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나약한 자의 변명일 테지만 적어도 기만의 필요와 방법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데 탁월하게 진화되어 왔다. 그것은 망각의 힘이기도 하고, 기억의 왜곡의 힘이기도 하며, 환상의 힘이기도 하다. 그것에 힘입어 사람들은 자신을 기만하고 타인을 기만한다. 사람들은 왜 자기와 타인을 기만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은 왜 해피 엔딩을 추구하는 것일까에 대한 답변과 같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추구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의 기저에 깔린 진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교육을 받지 않고 자기와 자기가 속한 조직을 기만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는 것일까. 

생존 본능은 어쩌면 가장 참혹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며, 서로서로 생존 본능을 북돋우며 살아간다고 하자면 내 형제 내 부모, 내 자식을 해치는 짓을 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터이다. 내 힘의 확장을 위해 만든 가족이 도리어 내 확장욕을 막는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잘라낼 수도 있을 테니까. 생존 본능이 한계를 모르고 극대화되는 것을 억제하고 그 기운을 조직의 안위로 옮겨가게 하기 위해 우리는 기만책을 익히며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파괴적이리만치 거대한 힘의 적절한 안배를 배워나가는 것이 인류에게 가장 다급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서 단 하나 그 기만책, 기만술을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소설가이다. 기만과 진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소설가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해피 엔딩이라는 퇴로를 두지 않고, 내 삶의 기만과 진실을 마주 응시할 수 있는 사람, 스스로의 기만을 자백할 용기는 없으나 기록할 수는 있는 사람, 그런 일부의 사람만이 비슷한 동기를 가진 사람 중에서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소설과 이야기는 어떻게 다르며 소설과 이야기가 갈라지는 지점은 어디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어느 누가 어떻게 언명할지언정 단 하나의 명백한 사실은 바로 ‘소설은 허구다’ 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묘사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이 잊혀지는 것을 가장 안타까워할까. 그것은 혹시 시선과 목소리가 아닐까? 시선과 목소리는 알다시피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 순간이 지나가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특별한 시선, 특별한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오로지 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자기 만의 시선과 목소리에서 비롯되어 타인의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실재하되 실재하지 않는 시선과 목소리가 ‘실제’하는 타인이 삶에 어떻게 침투하는 것일까. 바로 언어를 통해서 그렇게 된다. 우리가 가진 가장 섬세하고 지성적이며 감각적인 언어를 통해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와 언어는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당연히 실재는 언어로 재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사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언어로 재현하려는, 그 불가능에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학이다. 누군가를 잡아당기는 시선, 누군가를 더욱 가까이 붙들어두는 목소리. 그것이 언어로 몸을 바꿔 생생한 실체가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의 힘이다. 불가능에의 환상으로 유혹하고 기꺼이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행위와 소설을 읽는 행위이다. 

실재(實在)를 재현하려는 욕망, 그것은 기억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이었을 게다. 나한테 실제로 일어난 중요한 사건, 그때의 감정, 그것으로 인해 뒤바뀐 삶, 그것을 어떻게든 각인하여 남기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겠는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안타까운 몸부림인지 모른다. 기억을 그대로 남기고자 하는 시도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기억의 왜곡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 왜곡된 것이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음악은 그 다음의 시도였을 것이고, 현대에 와서는 사진이 가장 실재를 잘 반영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떨까. 언어는 그 긴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다. 언어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며 변화해간다. 더구나 우리는 말이라는 것은 약속된 기호일 뿐이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자는 더더욱 실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기억을 사실에 근접하게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실재는 재현될 수 없었을 테고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괴리가 있을 것이고 그 괴리를 메우거나 좁히기 위한 시도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문자를 통한 왜곡과 사실의 묘사에 대한 고민의 축적으로 사유가 발달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재현할 수 없는 실재를 재현하려는 시도이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실패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실패한 자의 기록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 형식 자체가 이미 실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실패한 자의 기록이고 실패는 기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실패는 기만에 휘둘리지 않을 때만이 실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실패를 기만했을 때는 실패가 아니므로 소설이 아닌 것이다. 소설이 애초에 실패를 기록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얼마나 화려한 언어를 통해 삶을 그려낼지라도 실패는 모든 소설 속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다. 

여기에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것이(형식과 내용 둘 다) 실패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즉,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인간이 자기 삶을 술술 풀어놓을 때 자기를 기만(위에서 말한 소설이 실재에의 재현에 실패한 기록임)하지 않으면 소설이고 자기를 기만하면 이야기인 것이다. 

즉, 재현할 수 없는 실재를 문자로 재현하려 하기에 이것은 실패이며, 내용 또한 실패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은 허구다’라는 명제의 의미이다. 인간은 자기가 안온하게 생존하기 위해 기만하는 존재이고 소설은 그 기만을 들춰내어 진실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이것이 기만과 진실의 인정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되겠다. 

또 하나는 이야기는 대개 기본적인 루틴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이 겪은 경험이나 체험으로 인해 생긴 개인적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쓰여진 글이다. 그래서 특별한 장치도 필요 없고 기법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소설은 허구임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실제의 재현을 위한, 그러니까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실재를 재현하기 위해서, 여러 겹 속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형식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으며 실재를 재현하는 방법으로 그 어떤 방식의 실험도 가능하다. 그래서 소설은 외연이 무한한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소설과 이야기를 가름한다.




‘어떻게’ 말하여지는가


똑같은 말도 유난히 맛깔스럽게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살을 붙이고 표정을 풍부하게 하거나 반대로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건조한 듯하지만 호기심을 잔뜩 자아내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요즈음에는 보통의 대화거나 강연이거나 소설이거나 짧고 분명한 어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졌다. 

작가란 언제나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충격 속에” 있다고 사르트르가 말했다. 작가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글의 내용, 즉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특히 소설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면 소설이 필요한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롤랑 바르트가 반론을 펼쳤다. 바르트에게 문학이란 ‘의사소통’이 아니라 언어 자체이다. “작가가 한 사회에 연루된다는 것은 그가 그 사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가 그 사회의 언어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 때문에 더 그런 것이다. 문학은 우선 형태적인 활동이다.” 바르트가 말한 ‘형태적인 활동’이라는 것은 언어의 형식,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말하든 말하는 형식에 작가의 사상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문학이 역사와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소설의 스타일이나 소설이 다루고 있는 메시지 등은 필연적으로 그 소설이 쓰여진 당대의 문제를 반영하게 되어 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여러 민족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트릭스터>가 있다. 인간의 일에 방해를 놓거나 가볍게 놀라게 하는 도깨비 같은 캐릭터다. 선악에 구애받지 않고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양쪽 모두를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이 태어나는 사회문화적 영웅인 존재, 즉 인간에게 불이나 문명을 가져온 문화영웅인 동시에 단순히 장난을 좋아하는 반사회적 파괴자이기도 하다.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내면에 깃든 괴물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드라큐라 백작>이라는 흡혈귀, 즉 뱀파이어 인간형이 나타났는데 이는 고성에 사는 귀족을 빗대서 살아있는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독점 자본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그 뒤에는 늑대인간형, 즉 인간성의 철저한 이중성에 대한 자각에 의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인간형이 나타났다. 이 세 존재는 비록 사람들 앞에 전면적으로 나타나지만 그 때문에 세계의 종말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의 끝 간 데 없는 욕망과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에 대한 대안이 없음으로 인한 종말에 대한 공포로 <좀비> 캐릭터가 대중적 문화에 침습하고 있다. 좀비는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무차별한 공격성을 통해 그 어떤 이념도, 이성도, 정념도, 어떤 깊이도 없는 눈 먼 대량의 욕망을 상징하고 있다. 즉, ‘인간의 얼굴을 한 후기 자본주의의 괴물성’을 표상한다 하겠다. 

이처럼 시대와 사회의 변화로 인한 인간 삶의 양태의 변화,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집요함이 있어야 하겠다. 롤랑 바르트 역시 이 문제를 주의 깊게 다루었다. 

“문학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은 오랜 역사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학을 본질로서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가치로서 접근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초역사적으로 즉, 시간을 뛰어넘는 문학이라는 본질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문학의 특수성이란 시대와 함께 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그렇다면 시와 소설은 인류학적 담론에 속하는가, 사회학적 담론에 속하는가. 문학이란 그 특수성이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의 인간 활동인가, 혹은 순수하게 사회학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언제나 어떠한 시대, 문화적인 주변상황과 연결되어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아직도 완전하게 답변되지 않은 문제이다.

바르트는 《글쓰기의 0도》에서 명쾌하게 보여준다.

문학의 영역이란 엄격한 문화적 결정론에 지배된다. 한편에 있는 문학의 기호들과 다른 편에 있는 독자에 의한 작품 수용태도들은 역사와 직접적으로 맺어져 있다. 작가는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그가 글을 쓰는 방식 안에서 예술을 의미한다. 문학 형식이란 독자의 취향에 종속되도록 강요받기에 항상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작가가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바로 이 관계가 진화하기에 문학 언어도 진화한다. 바르트의 글쓰기의 개념은 이러하다: <문학적인 문제의 중심에 놓여지고 오직 그와 함께 시작한 글쓰기는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형태의 율이다. 이것은 바로 작가가 사회적 영역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사회적 영역의 중심에서 작가 언어의 자연적인 천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대상의 역사성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독자의 역사성이기도 하다. 작품이 문화적이라는 것은 그 형태에 의해서만은 아니고, 작품이 수용자에게 유발한 감정적인 효과를 통해서도 그렇다.”

 

문학은 불가피하게 작가가 속한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에 의해 말하여지고 ‘무엇을 어떻게’ 말하였는지, 바로 그 말하는 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문학을 좋아하는 것이다.

문학은 여기에서 벌어진 어떤 현상에 대해 특수한 입장을 가진 작가가 개입하여 그 현상을 해석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또 하나의 경계가 생긴다. 어떤 사물, 어떤 사건을 진술이나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형식’을 통해 말하고 싶은 유혹에 휘말려야 소설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와쓰지 데스로우의 ‘풍토론’을 덧붙여 자신이 태어난 곳의 풍토성을 말하고 싶다. 사람은 자기가 오래 몸 담고 있음으로 해서 자기를 형성하게 된 풍토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자신의 풍토성을 잘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겠다. 동양인이 ‘가족’이라고 할 때와 서양인이 ‘가족’이라고 할 때 그 범위와 관계의 방식은 다른 것이다. 동양인 중에서도 유목형인 몽골인과 정주형인 한국인의 가족에 대한 관념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풍토란 물리적, 생물학적 차원의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요해(了解)방식이다. 인간 존재의 구조적 계기로서 ‘역사성’과 ‘풍토성’이 있으며 이 양자는 서로 긴말하게 작용하는 상즉(相卽)의 관계에 있다. 풍토란 일정 범위의 지역에 나타나는 기후, 지질, 토질, 지형, 경관을 총칭하는 용어로 인간의 거주환경으로서의 자연을 뜻한다. 가령, ‘한기’라는 독립 존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추위를 느낌으로써 한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춥다는 느낌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풍토적인 자기요해 방식은 개인적, 사회적 성격을 가지며 동시에 역사적이다. 인간은 단지 일반적, 보편적으로 ‘과거’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지역마다 특수한 ‘풍토적 과거’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역사와 격리된 풍토도 없으며, 풍토와 격리된 역사도 없다.”

여기에서 요해란 발견이라는 뜻이다. 자기의 삶의 터전이 위치한 지리적 환경을 낯설게 발견하고 해독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자신됨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존재 조건인 풍토성, 내가 모르는 새 나를 지배해온 풍토성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나의 풍토성을 제대로 반영한 소설을 쓸 것인가, 그것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자각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와쓰지 데스로우는 ‘풍토론’에서 우리의 상식적인 견해와는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강력한 왕권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보았다. 즉 모래폭풍에 의해 밤과 낮 사이에 달라지곤 하는 불규칙한 사막의 지형과 단조로운 환경에 둘러싸여 있던 사람들이 오직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기하학적이고 질서 있는 경관으로서의 피라미드를 원했다는 것이다. 아직 그 누구도 그 비밀을 풀지 못했으니만큼 하나의 관점 혹은 견해에 불과하겠지만 이런 관점으로 피라미드를 보는 것은 새로운 터전으로서의 사막을 보게 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에서 자각 없이 이루어지는 행동과 분위기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설적 현실


인생은 완결성이 없으나 소설은 어떻게든 완결성을 지녀야 한다. 언어가 이미 허구이고, 문자는 한 번 더 왜곡을 거친 허구인데, 소설은 실재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상황을 기억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그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경우는 명백한 이미지, 사람들의 표정, 배경까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멈춘 장면이라면 어떤가. 소리가 사라진 어떤 장면을 생각해 보자. 소리가 없다면 그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더 클로즈업을 시켜야 할까. 소리가 들린다고 가정하자. 이젠 그 앞뒤 상황이 있어야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앞뒤에서 이 사건을 일으킨 요인들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까. 이 한순간을 위해 얼마나 수많은 사건들이 낮게 엎드려 기어왔을까. 얼마나 자주 크고 작은 폭발을 하며 위협적으로 다가왔을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끊어야 할까. 이처럼 한편의 소설로 완결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적 현실이며 핵심 사건을 이해시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한편의 소설적 현실을 완성시키기 위해 문자를 통해 동원되는 것들이 장치이며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문체, 스타일이라고도 한다.

문자로 만들어지는 장치는 크게 보아 기호에 속한다. 기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편적인 공통점을 말한다. 기호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떤 관계성으로 연결하는 것, 즉 커뮤니케이션의 매개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려면 그 기호를 둘러싼 공통의 약속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유되고 있어야 하며 그 약속이 일정한 강제력이 있어야 한다. 이 약속을 ‘코드’라 한다.

이런 약속하에서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장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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