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에서 AI는 어떤 존재로 등장할까
1. 얼마 전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어떤 장면을 보게 되었다. 동백이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혼자 가 있곤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그 작은 마을의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을 찾는다는 설정은 이미 쓰일 대로 쓰여서 그 장면을 그닥 눈여겨 보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인물에 대한 깊은 시선이 바로 그 장면에서 특별하게 빛이 났다. 동백이는 도착하고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기 위해 기차역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동백이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곳은 <분실물센터>였다. 동백이는 분실물센터의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일하고 싶어요. 누구나 저 직원에게는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한번도아니고 여러번요. 아닌 게 아니라 무슨 물건인가를 찾은 어떤 남자는 직원에게 여러 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가 찾아주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동백이는 살아오면서 타인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거의 듣지 못했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반응을 얻은 적이 거의 없으며, 심지어 쓸모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했다. 한적한 시골의 작은 기차역, 잊은 물건이 없다면 누가 특별히 찾을 것 같지도 않은 분실물센터. 분실물센터 직원의 시점에서 보면 하루 종일 무료하기만 할 수도 있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자아상이 되기도 하는 것. 이 장면이 동백이라는 인물의 현실에서의 결핍을 보여줌과 동시에 무언가를 추구하는 내면을 가진 인물로서 입체화시켜주고 드라마의 방향을 이끌게 하는 신의 한 수였다고 보았다.
매회 반복되는 팔자타령이며, 부자 남자의 숨겨진 자식이며, 골목의 이지메 문화며, 그 이지메 문화를 시골의 은근한 속정으로 포장하는 흔한 스토리 라인에 대한 반감으로 결국 다 보지 못했지만, 작중 인물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만드는 능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깨달음.
2. 얼마 전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어떤 습작품을 보고 몹시 낙담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AI 튜링 테스트 프로그램으로 미국 MS사에서 한국인 직원에게 그 에이아이를 딸려보낸다는 게 전체 줄거리다. 얼핏 매우 흥미로운 소재였고 문체가 날렵하여 60대 남성의 습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한국인 직원이 어떤 과정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업체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거의 인간승리 스토리라 생략하고도, 아름다운 26살의 AI가 광고 모델이 되고 결국 튜링 테스트하러 따라온 직원과 결혼하게 되고, 인간이라 여기고 환호했던 모델이 AI라는 게 알려지게 되고,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들을 던지는데..... 글이 점점 내가 우려했던 상황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결국 남자와 AI와의 잠자리에 관한 질문이 핵심이었다는 둥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놈의 AI가 모델일도 완벽하게 잘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밥도 잘 짓고 시장도 잘 보고 살림을 완벽하게 하는가 했더니 더 나아가 남자의 옛 애인의 아이까지 키워주려하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었다. 이거 완전히 구시대의 가치관을 가진 남자의 여성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 이야기를 첨단을 달리는 소재로 포장하여 쓴 것이었다.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수많은 드라마가 여성의 남성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던가. 동백꽃 필 무렵도, 도깨비도, 태양의 후예도. (나는 여성의 판타지를 극대화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 왜 여성의 남성에 대한 판타지는 아무렇지 않게 용인될 뿐만 아니라 열광을 받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판타지는 이렇게 죽일 놈이라는 욕을 들어먹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지금 이런 글 쓰면 절대로 등단 끄트머리에도 가지 못해요.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인 줄 알아야 해요. 그러나 이 소설을 살릴 방법은 있을 것 같아요. 나라면 남성의 판타지를 채워주기 위해 한국으로 보낸 AI가 한국에서 완벽히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고 한국 남성들이 열광하며 이 모델을 사들이는 이야기로 쓰겠어요. 당연히 유럽 어느 나라로 보내는 AI, 미국에서 테스트하는 AI, 등으로 모델의 역할을 달리 설정하고요. 이렇게 쓰면 또 욕을 엄청 들어먹을 거예요. 한국 남자를 몽땅 싸잡아서 병신 취급하는 거냐고.
3. 사라진 친구에 대한 소설을 붙잡고 몇 달을 끙끙거리다가 결국 못썼다. 청탁 받은 두 곳에 줄 소설이 없어서 정말이지, 양심에 털 난 짓을 했다. 예전 습작기에 써둔 소설을 찾아 조금 손을 봐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내 습작기에 쓴 소설들을 보게 되었다. 뭔 놈의 연애소설 천지인지... 내가 그때는 그렇게나 연애가 중요했었던가, 싶었다. 연애만큼 상처가 깊은 것도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 소설판에서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에 관한 글들이다. 어찌 보면 연애는 그 모든 상황들을 품을 수 있을 텐데 왜 연애소설이 싹 사라졌을까..... 우리 소설판에서 이제 연애란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까지 자신의 연애가 어떤 모습인지 확신도 없고, 사회를 향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4. 그래서 내가 AI에 관한 소설을 쓰자, 했다. 최근의 AI뿐만 아니라 이전의 사이보그에 관한 소설과 영화들을 보면 인간들이 기계 인간에 대해 갖는 “기대와 공포” 그것이 주요 소재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먼 훗날 벌어질 사건에는 관심이 없다. 당장 가장 먼저 우리 곁에 올, 또는 필요로 할 AI라면 어떤 형태일까, 하는 게 내 관심사다. 미래에 가장 먼저 없어질 직업을 선정했다는 기사에는 번역가가 첫 번째요, 소설가도 마찬가지 신세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가장 필요로 할 AI는 어떤 역할을 할 AI가 될까. 윤이형이 <대니>에서 그 단초를 보여줬다. 아이 돌보미로 최적화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최적화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하게 한다. 소설은,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역할에 최적화된 존재를 만들었을 때 그 존재가 기대했던 것을 잘 이행하기를 바랄 뿐일 텐데, 당연하게도 에아이란 존재는 자기 진화를 하는 기계다. 기대와 예기치 못했던 능력의 발현, 그것으로 인한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는 것. 이게 대부분의 AI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치즈케익을 만드는 장인이 제자를 키울 수 없어 에이아이 사이트에 기본 모델을 주문하는 것, 거기에 염소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옵션으로 하나씩 추가하여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제품을 받고 제품이 하나씩 일을 배워나가면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 일단 재미있게. 재미없는 이야기 쓰다가 죽을 뻔했다. 자, 밥도 먹고. 진영 단감 깎아서 커피랑 먹었고, 오랜 만에 페북 글도 썼으니(주말 이틀 노니까 이거 참 좋네) 이제 소설 쓰자.
사람들은 왜 인간을 닮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빚었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생각하고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전능하지 않다. 인간은 성스러운 흙을 얻어 인간을 닮은 골렘을 빚었다. 그러나 골렘은 말을 할 줄 모른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골렘은 인간이 ‘시키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행동을 따라할 뿐이다.
인간은 본능에 따른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지적 작업을 통해 인간을 닮은 존재를 창조하는 이야기를 창작해왔다. 동물에도 인성을 부여해서 감정을 이입하고 심지어 인형에게도 이름을 붙이고 동일시를 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라온 나만 돌이켜봐도 본능인 것 같다. 인간이 빚은 존재들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있고 수많은 로봇과 사이보그와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 등의 존재들이 쏟아져나왔다. 심지어 죽은 인간인 좀비도 있다.
이들은 인간이 어떤 방향의 기대를 가지고 만들었으나 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또는 과잉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존재로 방향을 틀면서 인류에게 무력감을 안기는 역할을 맡아왔다. 기계에 불과한 존재들에게 물성 이상의 인간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더해 스스로 사유를 바라기도 한다. 그래서 스스로 진화한다는 AI까지 만들었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 결함, 또는 과잉으로 인한 사건들을 당연하게도 맞딱뜨리고, 피조물이 저질러놓은 사고를 보고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확인하고, 피조물 스스로 깨닫고 교정하기를 기대하기까지 한다. 인간은 바보인가.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는다. 아름다운 외모로만 만들어놓은 인간이 괴물로 태어난다. 이 괴물은 이름을 갖지 못해 괴물로 불리고 괴물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다. 정체를 부여받지 못해 자신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낳은 괴물에게 애틋한 부정을 느끼지만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다. 도망칠 뿐이다.
후손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고, 지적작업의 결과로 빚은 인조인간을 키워가는 과정 역시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다. 후손을 낳고 기르면서 인간은 나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와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에 의하면 인간이 불행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거침없는 팽창욕구를 지닌 존재이자 몸이라는 물성의 한계가 뚜렷한 존재임을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오이디푸스 기획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고 지탱함으로서 인간으로서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과정을 밟아가면서 인간은 ‘성격’이라는 신경증을 구축한다. ‘성격’이라는 것은 죽음에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구축하기 시작한 방어기제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팽창하고자 하거나 쉽게 무너져버리기도 한다. 이 거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빚으려 하는 것일 텐데, 나는 내가 빚은 인간을 키우며 더욱 두려움에 휩싸인다.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은 내 공포를 매일 확인하는 것이었고 어느 날, 내 공포가 그대로 반영된 존재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날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었다.
과잉 감각에 대한 ‘타다’ 연작 세 편, 골렘을 소재로 한 ‘지다’ 연작 세 편을 썼고 이제 ‘나다’ 연작을 쓰려고 한다. 태어나는 존재와 그 불완전한 존재를 바라보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 쓰고 싶다.
1. 얼마 전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어떤 장면을 보게 되었다. 동백이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혼자 가 있곤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그 작은 마을의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을 찾는다는 설정은 이미 쓰일 대로 쓰여서 그 장면을 그닥 눈여겨 보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인물에 대한 깊은 시선이 바로 그 장면에서 특별하게 빛이 났다. 동백이는 도착하고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기 위해 기차역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동백이가 하염없이 바라보는 곳은 <분실물센터>였다. 동백이는 분실물센터의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일하고 싶어요. 누구나 저 직원에게는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한번도아니고 여러번요. 아닌 게 아니라 무슨 물건인가를 찾은 어떤 남자는 직원에게 여러 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가 찾아주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동백이는 살아오면서 타인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거의 듣지 못했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반응을 얻은 적이 거의 없으며, 심지어 쓸모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했다. 한적한 시골의 작은 기차역, 잊은 물건이 없다면 누가 특별히 찾을 것 같지도 않은 분실물센터. 분실물센터 직원의 시점에서 보면 하루 종일 무료하기만 할 수도 있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자아상이 되기도 하는 것. 이 장면이 동백이라는 인물의 현실에서의 결핍을 보여줌과 동시에 무언가를 추구하는 내면을 가진 인물로서 입체화시켜주고 드라마의 방향을 이끌게 하는 신의 한 수였다고 보았다.
매회 반복되는 팔자타령이며, 부자 남자의 숨겨진 자식이며, 골목의 이지메 문화며, 그 이지메 문화를 시골의 은근한 속정으로 포장하는 흔한 스토리 라인에 대한 반감으로 결국 다 보지 못했지만, 작중 인물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만드는 능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깨달음.
2. 얼마 전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어떤 습작품을 보고 몹시 낙담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AI 튜링 테스트 프로그램으로 미국 MS사에서 한국인 직원에게 그 에이아이를 딸려보낸다는 게 전체 줄거리다. 얼핏 매우 흥미로운 소재였고 문체가 날렵하여 60대 남성의 습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한국인 직원이 어떤 과정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업체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거의 인간승리 스토리라 생략하고도, 아름다운 26살의 AI가 광고 모델이 되고 결국 튜링 테스트하러 따라온 직원과 결혼하게 되고, 인간이라 여기고 환호했던 모델이 AI라는 게 알려지게 되고,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들을 던지는데..... 글이 점점 내가 우려했던 상황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결국 남자와 AI와의 잠자리에 관한 질문이 핵심이었다는 둥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놈의 AI가 모델일도 완벽하게 잘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밥도 잘 짓고 시장도 잘 보고 살림을 완벽하게 하는가 했더니 더 나아가 남자의 옛 애인의 아이까지 키워주려하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었다. 이거 완전히 구시대의 가치관을 가진 남자의 여성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 이야기를 첨단을 달리는 소재로 포장하여 쓴 것이었다.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수많은 드라마가 여성의 남성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던가. 동백꽃 필 무렵도, 도깨비도, 태양의 후예도. (나는 여성의 판타지를 극대화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 왜 여성의 남성에 대한 판타지는 아무렇지 않게 용인될 뿐만 아니라 열광을 받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판타지는 이렇게 죽일 놈이라는 욕을 들어먹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지금 이런 글 쓰면 절대로 등단 끄트머리에도 가지 못해요.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인 줄 알아야 해요. 그러나 이 소설을 살릴 방법은 있을 것 같아요. 나라면 남성의 판타지를 채워주기 위해 한국으로 보낸 AI가 한국에서 완벽히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고 한국 남성들이 열광하며 이 모델을 사들이는 이야기로 쓰겠어요. 당연히 유럽 어느 나라로 보내는 AI, 미국에서 테스트하는 AI, 등으로 모델의 역할을 달리 설정하고요. 이렇게 쓰면 또 욕을 엄청 들어먹을 거예요. 한국 남자를 몽땅 싸잡아서 병신 취급하는 거냐고.
3. 사라진 친구에 대한 소설을 붙잡고 몇 달을 끙끙거리다가 결국 못썼다. 청탁 받은 두 곳에 줄 소설이 없어서 정말이지, 양심에 털 난 짓을 했다. 예전 습작기에 써둔 소설을 찾아 조금 손을 봐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내 습작기에 쓴 소설들을 보게 되었다. 뭔 놈의 연애소설 천지인지... 내가 그때는 그렇게나 연애가 중요했었던가, 싶었다. 연애만큼 상처가 깊은 것도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 소설판에서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에 관한 글들이다. 어찌 보면 연애는 그 모든 상황들을 품을 수 있을 텐데 왜 연애소설이 싹 사라졌을까..... 우리 소설판에서 이제 연애란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까지 자신의 연애가 어떤 모습인지 확신도 없고, 사회를 향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4. 그래서 내가 AI에 관한 소설을 쓰자, 했다. 최근의 AI뿐만 아니라 이전의 사이보그에 관한 소설과 영화들을 보면 인간들이 기계 인간에 대해 갖는 “기대와 공포” 그것이 주요 소재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먼 훗날 벌어질 사건에는 관심이 없다. 당장 가장 먼저 우리 곁에 올, 또는 필요로 할 AI라면 어떤 형태일까, 하는 게 내 관심사다. 미래에 가장 먼저 없어질 직업을 선정했다는 기사에는 번역가가 첫 번째요, 소설가도 마찬가지 신세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가장 필요로 할 AI는 어떤 역할을 할 AI가 될까. 윤이형이 <대니>에서 그 단초를 보여줬다. 아이 돌보미로 최적화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최적화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하게 한다. 소설은,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역할에 최적화된 존재를 만들었을 때 그 존재가 기대했던 것을 잘 이행하기를 바랄 뿐일 텐데, 당연하게도 에아이란 존재는 자기 진화를 하는 기계다. 기대와 예기치 못했던 능력의 발현, 그것으로 인한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는 것. 이게 대부분의 AI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치즈케익을 만드는 장인이 제자를 키울 수 없어 에이아이 사이트에 기본 모델을 주문하는 것, 거기에 염소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옵션으로 하나씩 추가하여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제품을 받고 제품이 하나씩 일을 배워나가면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 일단 재미있게. 재미없는 이야기 쓰다가 죽을 뻔했다. 자, 밥도 먹고. 진영 단감 깎아서 커피랑 먹었고, 오랜 만에 페북 글도 썼으니(주말 이틀 노니까 이거 참 좋네) 이제 소설 쓰자.
사람들은 왜 인간을 닮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빚었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생각하고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전능하지 않다. 인간은 성스러운 흙을 얻어 인간을 닮은 골렘을 빚었다. 그러나 골렘은 말을 할 줄 모른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골렘은 인간이 ‘시키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행동을 따라할 뿐이다.
인간은 본능에 따른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지적 작업을 통해 인간을 닮은 존재를 창조하는 이야기를 창작해왔다. 동물에도 인성을 부여해서 감정을 이입하고 심지어 인형에게도 이름을 붙이고 동일시를 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라온 나만 돌이켜봐도 본능인 것 같다. 인간이 빚은 존재들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있고 수많은 로봇과 사이보그와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 등의 존재들이 쏟아져나왔다. 심지어 죽은 인간인 좀비도 있다.
이들은 인간이 어떤 방향의 기대를 가지고 만들었으나 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또는 과잉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존재로 방향을 틀면서 인류에게 무력감을 안기는 역할을 맡아왔다. 기계에 불과한 존재들에게 물성 이상의 인간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더해 스스로 사유를 바라기도 한다. 그래서 스스로 진화한다는 AI까지 만들었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 결함, 또는 과잉으로 인한 사건들을 당연하게도 맞딱뜨리고, 피조물이 저질러놓은 사고를 보고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확인하고, 피조물 스스로 깨닫고 교정하기를 기대하기까지 한다. 인간은 바보인가.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는다. 아름다운 외모로만 만들어놓은 인간이 괴물로 태어난다. 이 괴물은 이름을 갖지 못해 괴물로 불리고 괴물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다. 정체를 부여받지 못해 자신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낳은 괴물에게 애틋한 부정을 느끼지만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다. 도망칠 뿐이다.
후손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고, 지적작업의 결과로 빚은 인조인간을 키워가는 과정 역시 개인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다. 후손을 낳고 기르면서 인간은 나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와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에 의하면 인간이 불행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거침없는 팽창욕구를 지닌 존재이자 몸이라는 물성의 한계가 뚜렷한 존재임을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오이디푸스 기획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고 지탱함으로서 인간으로서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과정을 밟아가면서 인간은 ‘성격’이라는 신경증을 구축한다. ‘성격’이라는 것은 죽음에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구축하기 시작한 방어기제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팽창하고자 하거나 쉽게 무너져버리기도 한다. 이 거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빚으려 하는 것일 텐데, 나는 내가 빚은 인간을 키우며 더욱 두려움에 휩싸인다.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은 내 공포를 매일 확인하는 것이었고 어느 날, 내 공포가 그대로 반영된 존재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날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었다.
과잉 감각에 대한 ‘타다’ 연작 세 편, 골렘을 소재로 한 ‘지다’ 연작 세 편을 썼고 이제 ‘나다’ 연작을 쓰려고 한다. 태어나는 존재와 그 불완전한 존재를 바라보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