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 하는 이유
이런 생각을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사이비 종교 공동체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고 연인 간에, 혹은 가족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런 사건들을 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해자를 비난하면서도 피해자를 동정하고 싶지도 않다는 반응을 하곤 한다. 어떻게 그런 판단도 하지 못하느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어떻게 그런 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필요로 하는 것'일까. (지배욕과 통제 받으려는 욕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해체되면, 그 공동체가 와해되면 그들은 다른 관계, 공동체를 찾아간다.)
우리 사회에서 몇몇 분들을 '어른'으로 모시던 시대가 있었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위기가 닥칠 때, 혹은 혼돈에 시달릴 때 굵고 담백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위로를 해주던 분들이 있었다. 기업가도 아니고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그분들은 전통 사회에서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일까, 고장의 어르신 역할을 하던 분들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찌 됐든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국민 멘토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이 떠난 후 우리 사회는 '히어로'를 찾기 시작했지만 잠깐 떠올랐던 사람들 대부분이 실망을 안겨주었다.
전통 사회의 잔재가 아직도 우릴 에워싸고 있는 걸까. 우리는 왜 아직도 천문을 읽고 '길'을 알려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걸까. 어느 날부터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얻은 통찰과 사유, 그리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강연 프로그램이 수도 없이 생겼다. 나 역시 교육청 프로그램에 속해서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또 성인 대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강연을 많이 다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불안하고 우울하고 암울했다. 그 결과 분노가 수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BTS와 블랙핑크가 세계를 누비는 것을 볼 때마다 자기 처지를 더욱 비관했다. 이 사회적 감정의 파고가 수위를 높여가다가 파국으로 치닫을 지경에 이르러 등장하기 시작한 분야가 심리학 상담 강연이었다. 선진국에서는 개인들이 어렵지 않게 드나드는 심리상담소가 강연장에 올라가게 되었다. 한 사람의 심리상담사는 한 사람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장에서 한 덩어리의 사람들을 치유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 받게 되었다. 혹은 유튜브에서 익명의 사람들을 대량으로 치유하는 매뉴얼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시작했을까.
왜 자기 감정과 사고에 대한 믿음이 없어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가 길을 제시해주기를, 누군가가 가르침을 주기를 그토록 갈망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의견과 주장을 하는 데 관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의견을 글로 쓰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 의견, 자기 주장을 제시하고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주장에 맞서면서 자기 주장의 근거를 찾아 스스로 판단을 교정해나가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 가정에서도 착한 아이, 부모의 뜻을 잘 따르는 아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이로 키우기를 희망한다. 미국 영화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데, 가족 영화를 보면 여자아이가 엄마나 아빠에게 단호하게 NO! 라고 외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여자 아이한테는 특별히 자기 의견과 다를 때 상대방이 엄마 아빠라 할지라도 강요 당하지 않도록 교육 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제 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여성으로 자라야 한다. 여성은 어떤 사회든 사회적으로 아직은 약자니까.
어린 아이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들의 주장을 글로 쓰게 하고 발표하게 하는 교육이 그래서 필요하다.
글로 쓰면 일단 객관물이 된다. 기승전결이 생긴다. 거기에서 이차적으로 또 기승전결로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사유는 방향이 있고, 진행되어야 하며 인식의 확장을 이루어야 한다. 인식의 확장은 타인과의 교류가 또한 필수적이다. 자기 안에 갇히면 확장은 없으니까.
객관물이란 나 외의 타인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기의 교환 같은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보다 더욱 좋은 것은 리포트든, 포스팅이든, 타인이 읽을 수 있게 쓰는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더 나아가 그것이 인쇄되어 나오기를 바라게 되면 또 다른 과정이 이어진다. 자기 글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문장의 오류는 없나, 이거 나 혼자 만 알 수 있는 글인 것 아닌가. 누군가가 읽는다면 어떻게 읽히면 좋을까, 등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통제를 강렬히 원하는 사람들, 자기 지배욕을 타인의 손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죽하면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대가 다시 와야 한다고들 할까. 그들이 원하는 건 사회의 규범과 질서가 아니라 자기 손에 넣고 주무르는 것이다. 자기 의견이 없고, 하루를 어떤 규칙 속에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의견이 없으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까지, 아니 저 세상까지 저들의 손아귀에 넣어주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 공동체와 독재자를 원하는 국민은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자 하고 책을 내서 읽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책을 권위와 동급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는 일을 통해서든, 특별한 경험이든, 취미 생활을 통해서든,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 관해서든, 자기 감정, 표현, 자기 주장, 의견 개진 을 적극적으로 하기를.
이런 생각을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사이비 종교 공동체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고 연인 간에, 혹은 가족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런 사건들을 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해자를 비난하면서도 피해자를 동정하고 싶지도 않다는 반응을 하곤 한다. 어떻게 그런 판단도 하지 못하느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어떻게 그런 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필요로 하는 것'일까. (지배욕과 통제 받으려는 욕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해체되면, 그 공동체가 와해되면 그들은 다른 관계, 공동체를 찾아간다.)
우리 사회에서 몇몇 분들을 '어른'으로 모시던 시대가 있었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위기가 닥칠 때, 혹은 혼돈에 시달릴 때 굵고 담백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위로를 해주던 분들이 있었다. 기업가도 아니고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그분들은 전통 사회에서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일까, 고장의 어르신 역할을 하던 분들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찌 됐든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국민 멘토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이 떠난 후 우리 사회는 '히어로'를 찾기 시작했지만 잠깐 떠올랐던 사람들 대부분이 실망을 안겨주었다.
전통 사회의 잔재가 아직도 우릴 에워싸고 있는 걸까. 우리는 왜 아직도 천문을 읽고 '길'을 알려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걸까. 어느 날부터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얻은 통찰과 사유, 그리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강연 프로그램이 수도 없이 생겼다. 나 역시 교육청 프로그램에 속해서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또 성인 대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강연을 많이 다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불안하고 우울하고 암울했다. 그 결과 분노가 수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BTS와 블랙핑크가 세계를 누비는 것을 볼 때마다 자기 처지를 더욱 비관했다. 이 사회적 감정의 파고가 수위를 높여가다가 파국으로 치닫을 지경에 이르러 등장하기 시작한 분야가 심리학 상담 강연이었다. 선진국에서는 개인들이 어렵지 않게 드나드는 심리상담소가 강연장에 올라가게 되었다. 한 사람의 심리상담사는 한 사람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장에서 한 덩어리의 사람들을 치유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 받게 되었다. 혹은 유튜브에서 익명의 사람들을 대량으로 치유하는 매뉴얼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시작했을까.
왜 자기 감정과 사고에 대한 믿음이 없어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가 길을 제시해주기를, 누군가가 가르침을 주기를 그토록 갈망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의견과 주장을 하는 데 관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의견을 글로 쓰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 의견, 자기 주장을 제시하고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주장에 맞서면서 자기 주장의 근거를 찾아 스스로 판단을 교정해나가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 가정에서도 착한 아이, 부모의 뜻을 잘 따르는 아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이로 키우기를 희망한다. 미국 영화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데, 가족 영화를 보면 여자아이가 엄마나 아빠에게 단호하게 NO! 라고 외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여자 아이한테는 특별히 자기 의견과 다를 때 상대방이 엄마 아빠라 할지라도 강요 당하지 않도록 교육 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제 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여성으로 자라야 한다. 여성은 어떤 사회든 사회적으로 아직은 약자니까.
어린 아이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들의 주장을 글로 쓰게 하고 발표하게 하는 교육이 그래서 필요하다.
글로 쓰면 일단 객관물이 된다. 기승전결이 생긴다. 거기에서 이차적으로 또 기승전결로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사유는 방향이 있고, 진행되어야 하며 인식의 확장을 이루어야 한다. 인식의 확장은 타인과의 교류가 또한 필수적이다. 자기 안에 갇히면 확장은 없으니까.
객관물이란 나 외의 타인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기의 교환 같은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보다 더욱 좋은 것은 리포트든, 포스팅이든, 타인이 읽을 수 있게 쓰는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더 나아가 그것이 인쇄되어 나오기를 바라게 되면 또 다른 과정이 이어진다. 자기 글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문장의 오류는 없나, 이거 나 혼자 만 알 수 있는 글인 것 아닌가. 누군가가 읽는다면 어떻게 읽히면 좋을까, 등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통제를 강렬히 원하는 사람들, 자기 지배욕을 타인의 손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죽하면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대가 다시 와야 한다고들 할까. 그들이 원하는 건 사회의 규범과 질서가 아니라 자기 손에 넣고 주무르는 것이다. 자기 의견이 없고, 하루를 어떤 규칙 속에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의견이 없으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까지, 아니 저 세상까지 저들의 손아귀에 넣어주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 공동체와 독재자를 원하는 국민은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자 하고 책을 내서 읽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책을 권위와 동급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는 일을 통해서든, 특별한 경험이든, 취미 생활을 통해서든,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 관해서든, 자기 감정, 표현, 자기 주장, 의견 개진 을 적극적으로 하기를.